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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 기독교사상 5월호-

2008.04.03 07:33

운영자 조회 수:18076



목회현장을 찾아서 _
                           "진달래교회 이병창 목사"

‘눈 뜨면 이리도 고운 세상’ 임을…

산길을 돌고 돌아, 그곳에 당도했을 때 우선 두 가지가 신기했다. 오는 동안도 산뿐이요, 가는 길도 산 밖에는 안 보일 것 같은 정경 속에 턱하니 나타난 예쁜 건축물들 하며, 조각품들로 꾸며진 너른 공간이 그 첫째이고, 인가도 없는 이 산 속에 어쩌자고 교회를 지었단 말인가 하는 것이 어리숙하게 따라붙는 두 번째 신기함이었다.
이곳, ‘불재 뫔 도예원’은 경각산 마루 전북 완주군과 임실군의 경계를 지나는 불재라는 이름의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예원 안에는 여러 채의 흙집들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진달래교회였다.
마침 주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끝내고 아직 돌아가지 않은 몇 분의 교우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병창 목사도 그곳에서 함께 담소 중이다.
육각형으로 지어진 그곳은 식사도 하고 손님도 맞고 하는 그런 공간인 듯 했다. 이병창 목사는 얼굴빛이 맑고, 목소리가 밝았다. 고백하자면 산 속에서 정신 수련을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 전에는 조금의 선입견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은 바뀌어갔다.
‘뫔’ 이야기부터 들었다. 몸과 마음을 뜻하는 이 말은 특허까지 낸 신조어이다. 이 목사는 창세기 1장에서 이 말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은 우선 생각에 의해 그 빛이라는 존재가 나온 것 아니겠어요? 제가 이 육각형 집을 짓는데도 먼저 생각을 했으니까 이렇게 지었겠죠. 생각과 현실이 딱 맞아 떨어지면 기쁘지요. 삶을 기쁘게 사는 방법은 생각과 현실을, 의식과 몸을 일치시킬 때 기가 뿜어져 올라와요. 바로 ‘기쁨’이죠. 제가 ‘빛이 있으라’란 그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뭘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합쳐진 것이며, 한 단어로는 표현하자면 ‘뫔’이면 되겠다 했어요.
이 목사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의 분리로 인해 삶의 에너지가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뫔과 관련하여 4가지 모양을 일러주었다. 그 첫째가 해서는 안 될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며 두 번째가 많은 이들이 걸려 있는 유형인데, 하나마나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는 꼭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 마지막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때 ‘뫔’이란 뜻은 내면에서 정말 원하는 일, 그거 하면서 살자는 거다.
이병창 목사가 황무지 같은 경각산 언덕에 땅을 일구어 집을 짓는 일이란 경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허한 일이다. 이 목사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면 여기에 집 짓고 이러지 않았으리라 말한다. 이곳에 이렇게 집과 교회를 짓게 된 것은 성경 속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다.
“성경구절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하고 주막에 맡겼다는 내용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나는 ‘주막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진달래교회를 전주 시내에서 시작했는데, 내가 생각한 주막목회를 하기란 어려웠어요. 교인들의 의식도 교회는 이런 곳이고 목사는 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고요. 말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따라 주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방식으론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내가 하고 싶어도 시스템 자체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실제로 시내 교회에 누가 찾아오면 재워 줄 수를 있나. 먹여 줄 수가 있나. 하지만 여긴 가능하잖아요. 자고 갈 수도 있고, 같이 먹기도 하니 말이에요.”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주막목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의 개혁이 어려운 점은 돈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천만 원이 있는 교회나 일억이 있는 교회나 거개가 목사 생활비나 교회 경상비에 쓰이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립구조 시스템으로 가지 않으면 교회 개혁은 어렵다고 보았다. 예전에 한 지인 목사가 그에게 우스개처럼 건넨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단다. 목사를 쉽게 재미있게 하려면 먼저 돈 받지 말라는 거였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자립하라는 것이다. 또 설교 준비 하지 마라는 거였다. 그렇게만 하면 목사도 할 만하다는 것이 그 목사가 전한 조언이었다고 한다.
진달래교회는 설교가 특별하다. 교인들이 돌아가며 말씀을 나누고 목사님이 전체적인 마무리를 해주기 때문이다. 도예촌이며, 에니어그램 교육, 찻집 등에서 경제적 자립구조도 만들어 나간다. 진달래교회의 교우 수는 셀 수가 없다. 늘 그 수가 바뀌기 때문이다. 완주나 임실 근교에 있는 이들도 찾지만, 전주나 서울 또는 다른 지역에서도 수시로 찾아오고, 외국에서도 곧잘 이곳을 찾아 날아든다.
이병창 목사의 예명은 ‘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물님’이라 부른다. 그의 예명인 ‘물’은 본질은 변하지 않되, 액체나 기체, 고체 등으로 변할 수 있는 물의 특성처럼 자신도 그 변형의 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을 갖고 지난 20여 년간 사용해 왔다. 그처럼 그는 본질은 명료하되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왔다.
그는 이례적으로 3개 교단-장로교, 감리교, 기장-을 거쳐 왔다. 10여 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처음 신학교를 들어 간 곳은 장로회신학대학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예수병원의 선교사로부터 장애인 시설을 맡아 일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50명 정도가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그분들이 3년 정도 살면서 자립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인 빌리지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전국으로 장애인 시설을 돌아보니, 그런 형태가 일자리 창출은 되지만 자율적인 생각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 같으면 한시도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빌리지로 가서는 안 되고 패밀리로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고, 곧바로 익산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예수병원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소개 받아 같이 생활하게 되었어요. 하다 보니 내가 생각한 시스템이 좋더라고요. 그들이 주인이 되니까요. 저는 써포트 해 주는 입장이고.”
그럴 즈음, 어느 날 신학교 운동장에 서서 결심을 굳혔다. ‘학교를 그만두고 그들에게로 가자’도서관에서 읽은 이용도 목사의 책에서 감동을 받은 것도 한 몫을 했다. 하나님은 내 가슴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곤 기숙사에 짐이며 책을 그대로 놔둔 채 학교를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 길로 익산 재활의 집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던 중 잘 알고 지내던 한 목사가 김하태 박사가 목원대 대학원장으로 왔으니 그분을 찾아가라며 일러주었다. 김하태 박사를 찾아가 3년 6개월가량 공부하고 1985년 목원대학원을 졸업했다. 김하태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시면서 이 목사에게 함께 도미할 것을 권유했다.
“제가 미국 가서 학위 받아 돌아오면 교수 밖에 더하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에게 제 앞가림 할 정도는 배웠고, 미국 갈 시간과 돈이 있다면 여행 다니면서 지구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김 박사님은 떠나시던 전날 제게 손수 밥상을 차려 주셨지요.”
대학원을 다닐 무렵 감리교에 대해 알기 위해 한 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병창 목사는 CBS 시사칼럼을 오랫동안 맡아 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장이 교단인 다른 목사와 격일로 방송을 했었는데, 어느 날 그 동료 목사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런가 물어 보니, 네 군데의 시골교회가 있는데, 지원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얘길 듣고 이 목사는 그 네 교회 중 가장 어려운 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설교해 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렇게 일러준 교회가 익산삼기교회였다. 다 쓰러져가는 교회인 줄 알았는데, 벽돌 건물에 외관도 훌륭하고, 장로도 다섯 분이나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회 주변에 그가 좋아하는 대밭이 있었다. 결국 그 교회에서 3년을 시무했다. 1990년 진달래 교회를 세우면서, 그 사이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한신대학원을 또다시 마치게 되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네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전 각 교파에 몸담으면서 예수 모습이 다 다르더라는 걸 명료하게 봤어요. 그렇다면 무엇인가?…서울에서 선교사를 후원하는 모임이 만들어지는데, 제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해요. 그래서 떠오른 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는 사람들’이라 했으면 좋겠다 그랬어요. 피부색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도, 심지어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진실로 그리스도 얼굴을 찾고자 한다면 난 부딪칠 게 없다고 봐요.”
뫔살리기 수련원에서는 에니어그램과 글쓰기 등을 통한 감수성 훈련, 댄스 세라피를 통한 심리치료나 호흡 및 명상 등의 수련을 진행하고 있다.
이병창 목사는 뫔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명상 프로그램인 에니어그램에 관심을 가진 뒤 그동안 줄곧 그 방면의 공부를 해 왔다. 그러다보니 육체로 나를 아는 것까진 뚜렷해졌는데,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수피즘을 만나게 되었고, 다양한 영적 수련 공동체에서 수행해 왔던 방법들을 접목시켜 나갔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수피댄스는 그 수행방법에 빠져 전문적인 인도분을 모셔와 숲 속에 수련장을 만들어 배우기도 했다. 또한 더 나아가 터키로 가 쉐마장이라는 리더에게 오리지널로 사사를 받기까지 이르렀다.   뫔이 한 일이었다. 해서 기쁨이었다.
그는 그동안 배우고 공부한 에니어그램을 사람들에게 알려나갔다. 찾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강의도 하고, 신문에 연재를 하기도 하고, 불재 뫔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과정대로 진행하기도 했다. 그가 하는 것은 셀프마스터 에니어그램이다.
“에니어그램이 이제껏 주로 어떤 유형론을 얘기하는데, 저는 그 유형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중심을 둡니다. 인간은 어차피 시간과 공간 안에 살기에 한꺼번에 두 가지 길은 못가잖아요. 올라갈 때는 9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했다면 정상에 오르고 난 뒤에는 어떠한 길로도 내려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 포인트가 10번이에요. 지금까지 에니어그램은 9가지 유형으로만 보는데, 전 10번까지 이야기해요. 그래야 전체가 명료해지거든요.”
주로 성직자나 이런 명상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한 번은 전주에서 생활보호대상자들만을 대상으로 진행시킨 적이 있다. 모이라고 하니 모이긴 했지만, 뭘 들으려 하지 않았고, 쉽게 주입시킬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 분들은 주로 브레이크가 없이 원색적인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하는 것은 모험이었죠. 하지만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1차 때는 제가 전주에 내려가 진행을 했지만  2차 때는 이곳 불재에 오셔서 함께 했어요. 그걸 통해 전 자신을 얻었어요. 에니어그램이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 말이죠.”
불재 뫔에는 여러 가지 조각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단연 많은 것은 토우이다. 특히 어린아이 형상을 한 토우가 많다. 그가 좋아하여 직접 만든 것들이다. 그가 안내하여 들어간 찻집은 둥근 집이었는데, 거긴 여러 가지 북이 놓여 있었다. 북에 푹 빠져서 큰 북, 작은 북 할 것 없이, 여러 곳에서 진기한 북을 모으고 있는 중이란다.
진달래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눈 뜨면 이리도 고운 세상’이란 글귀가 푯대에 새겨져 있다.
“거듭난다는 것을 설명하자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아름다웠다 하는 그 세상을 아름답게 못 보는 나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 떠지는 나로 되는 게 그게 거듭남이지요. 종교적 교리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서 거듭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교인들에게 그래요. 오늘 핀 꽃들에게 정말 사랑의 마음을 주고,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는 교인이었으면 좋겠다. 눈 뜨면 고운 세상인거죠. 아름답게 못 보는 내게 문제지 그게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걸 보는 눈을 뜨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죠.”
이병창 목사가 살면서 영적으로 큰 힘을 얻은 곳이 있다. 바로 동광원이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다음 날 나서는데, 굳이 그를 배웅하겠다고 따라나선,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있었다. 사양을 해도, ‘우리가 배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어요?’라고 도리어 부탁을 하는 바람에 같이 산을 내려 와 버스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순간 그는 욕지기가 끌어 올랐다. 그런데 동시에 그 두 분이 하는 말은 이랬다. “어, 비를 주시네.” 그는 순간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 말씀과 함께 비를 바라보는 그분들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뭔가’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회 운동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땡전뉴스’만 나오면 아이들에게 ‘저거, 끄라’고 소리를 치지 않았던가. 독재정권을 미워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집 안에서 독재자처럼 굴었던 게 아니던가. 단지 TV영상일 뿐인데, 거기에 분노를 일으킨 이 요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오래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이 그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동광원을 찾아갔고, 여러 분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배우는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에 배울 게 있었다. 그때 만나 뵌 분들 중 오북환 장로님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성서에 그만큼 깊이 있는 분은 아직 못 만났어요. 제가 정말 괴로울 때 그분을 찾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은 조용한 침묵 속에서 단지 한 말씀만 하셨지요. ‘ㅁ, ㅂ, ㅍ 으로 풀으셔.’ 이 말씀이 뭘까요? 오늘 이것만 풀고 가도 좋은 얘깃거리일 텐데…,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단단한 떡을 입 안에 물고 있으면 불려 져서 풀어진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로 꽉 깨물고 있으면, 이만 상하고 또 중요한 것은 떡도 먹지 못한다는 겁니다. 입 안에 가만히 물고만 있으면 결국 풀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병창 목사의 소원은 당신을 만나고 가는 사람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가도 왠지 가벼워져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가식적으로 만들어내고, 보여 지고자 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 그 자신 오북환 장로님께 마음의 짐을 덜고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 불재 뫔에서는 음력 6월 달이면 보름달 축제를 한다. 2000년부터 매년 행사를 해왔다. 살아남은 자를 위한 축제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소신껏 살아왔지만 알게 모르게 억압 속에서 스스로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치유해나가는 공간이다. 그 축제를 통해 중년 남자의 눈물을 보았고, 신명나는 춤을 보았고, 풀어지는 마음들을 보았다.
올해도 열릴 예정이지만 어떤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제껏 그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이 만들어 질 것이라고만 예상한다.
하루를 묵어도 좋겠다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은 떠나야 했다. 뫔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니 왠지 아쉽다. 하지만 이병창 목사를 만나고, 불재 뫔을 떠나면서 산길을 다시 굽이굽이 돌아 나가면서 확실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위로 받고 싶을 때 오고 싶은 곳이다. 무엇보다 통곡하고 싶을 때 한 번 꼭 오고 싶은 곳이다. 또다시 만나게 될 분이다. ‘뫔’에 갑자기 든든한 힘이 생긴다.
봄볕이 즐거이 와락 안겨 온다.

    글_이영란·사진_김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