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복의 '숲.
2013.03.31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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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코리아 작품평론
시대성을 가진 화가가 되고 싶진 않다.
시대를 이끄는 예술가가 되고 싶을 뿐..
박수복 화백
그는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든 걸 버리고 서울을 떠나 지금 그가 있는 서산에 자리를 잡은 것을 보면 그에겐 남의 시선이나 겉을 꾸미는 여러 요소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다만 작품을 하는데 있어 좀 더 감성적이고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이 우선시 될 뿐이다. 아! 그리고 청바지다. 자유를 부르짖는 찢어진 청바지 말이다.
그래서 인지 그의 작품엔 여유가 묻어 있다. 공간 활용과 붓 터치, 소재의 사용에 있어 어느 것 하나 복잡하거나 다급하지 않다. 그저 신선이 붓을 놀리듯 흰 캔버스가 채워지고 있었다.
동서양 접목, 일필휘지의 기법으로 서양화를 그려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서양화에선 지금까지 볼 수 없는 구도와 여백을 보이고 있다. 가히 혁신적이라는 말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여태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법을 박수복 화백이 시도한 것이다.
채우고, 쌓고, 긁어내던 기존의 서양화에 동양적 기법을 추구하며 동서양의 미학을 하나의 캔버스에 완성하고 있는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 그가 지금의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품에 대한 주변의 우려가 컸지만 유럽에서는 반응이 달랐다.
한국인이 따라 그려내는 서양화, 매번 보던 동양인이 그리는 동양화와는 차원이 다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여백이 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중심을 잡고 있는 힘의 한 점이 있다. 그 점은 수묵이 번지듯 유화의 기름이 번지는 효과로 동양적인 기법이 표현돼 있다. 채워는 것을 미학으로 두는 서양화에 동양적 기법을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어색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원래부터 서양화는 이렇게 그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한 가지! 서양화를 일필로 그려내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런 기법이 서양화에 적당한가는 의문이 들지만 박수복 화백이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눈에 보이는 사실을 머리가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
시각적이고 구조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서양화가 박수복의 생명성(Vitality)의 피력(披瀝)
현대인은 자주 깊은 공허감에 직면하곤 한다. 정신분석학자 롤로 메이(Lollo May) 에 따르면. 그 공허감은 생(生)과의 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빈곤해진 것에서 기인한다. 하늘과 바다와 산 등 자연에 대해 더 할 수 없이 냉랭해진 반명,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열정적이 되도록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Paul Tilltch) 의 유명한 탄식을 빌자면, 현대인에게 "세계는 이제 매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박수복 화백은 여전히 세계의 매력, 특히 유혹하는 자연에 흠벅 빠져있다. 그는 바다의 움직임과 색조의 변화를 주관했던 프로테우스처럼, 그의 앞에 놓여진 자연을 초대하고 취급하고 경영하기를 즐긴다. 그에게 자연은 그릴만 한 대상 이상이고, 형형색색의 보고(寶庫)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자연은 존재의 뿌리를 담고 있는 근간으로서, 인식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교감해야 할 상대인 것이다.
실존의 조건이자 가능성인 동시에 장애이기도 하다. 그의 관심은 이제 자연으로부터 생명의 감(感)을 회복하고, 선물처럼 그 사색을 얻는 데에 집중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의 작업이 최근에 보이는 선회, 즉 '자연의 시적(詩的) 재현' 이랄수 있는 것에서 자연의 보다 본질적이고 통합적인 탐구로 나아가려는 방향전환이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붓의 놀림과 농담은 전에 없이 자유롭고 대담하다. 때론 무겁거나 거칠고, 부드럽고 느긋하기도 한 포괄적인 색의 확산은 예리하거나 완만하고 다양한 터치들을 아우르면서 박수복 화백의 것을 더욱 신비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