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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대통령. 강남대통령

2009.06.01 07:24

물님 조회 수:6809

서민 대통령, 강남 대통령

 

이 병 창(시인. 진달래교회 목사)

 

북한의 핵실험보다도 더 큰 충격과 반응을 보여준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이 지난주에 있었다. 봉화 마을에서 ‘도도’님이 보내 온 문자 메시지는 “조문을 도리어 받고 감, 아직 하늘나라 못 가시고 국민들을 위로하고 계시는 임을 만나고 감”이라고 써있었다. 인간성보다도 도덕보다도 돈의 기준으로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의 어리석은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경각의 통한을 보여주는 현장을 나 또한 광화문과 시청광장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국민들이 이심전심으로 노무현이라는 인간을 새롭게 깨닫는 내용은 무엇보다도 서민 대통령과 강남 대통령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이제야 값 비싸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똑똑한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은 두 지도자의 얼굴과 살아온 삶의 이력을 찬찬히 바라보면 소경이 아닌 다음에 곧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용산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타 죽어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는 사람도 없는 이 나라의 현실 속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막다른 상황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들이 시청광장에서 울고 있었다. 노무현을 맹목적으로 욕하던 사람들도 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며 함께 울고 있었다. 국민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 시청 광장을 전경버스가 둘러싸고 있고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는 공권력의 폭력 앞에서 울부짖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을 내 편으로 이끌지 못하는 용기도 힘도 없는 권력이 참으로 불쌍하기만 하다.


인간 노무현을 농부로 남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들은 몇 년 후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왜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내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가? 나는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매하게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럽고 마음이 아프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은 실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멀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주관적 안경을 쓰고 사물에 관한 투사된 이미지를 볼 뿐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대와 잠재된 두려움을 대상 속에 투사시킨다. 투사 안경을 통해 사물과 환경과 인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기 까지는 인간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혁명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한 스티븐 호킨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저서인 ‘의식혁명’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현재 세계 인구의 85%는 지수 200(용기. 1000기준)이하의 의식 레벨에 머물러 있다. 오직 세계인구의 0.4%만이 지수 500(사랑)의 의식 레벨에 도달한다. 그리고 한 개인이 일생 동안 이룰 수 있는 의식 레벨 성장은 지수 5가 고작이다. 그래서 세계 인구 전체를 의식 레벨에 따라 정리해 보면 지수 200을 경계로 기울기가 급하게 변하는, 끝이 뾰족하고 밑이 아주 넓은 피라미드 형태가 된다” 심리학 역시 투사 안경을 쓴 사람은 실재를 안경 색깔로 채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통해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통찰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 근거 없는 소문만 듣고도 뿌리 깊은 미신을 만들어 낸다. 그들에게 사실은 아무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들에게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신과 가상현실이 ‘실재’로 대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미신이 중세의 마녀 사냥이 되기도 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소크라테스의 독배가 되기도 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한번 나뿐 사람은 영원히 나뿐 사람으로 낙인찍는 일은 우리 삶의 영역에서 흔한 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스승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해 왔다.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바라보는 대상을 과거의 눈으로 보지 말고 지금의 눈으로 보라고. 그리고 내 시야가 아니라 진리의 조명 아래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래야만 우리는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세상이 모두 한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때 우리는 자신에게 신중하게 물어야 하고 하느님께 물어야 한다. ‘이 돌을 던져야 하느냐고’ 그러면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치라’는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서 3장에는 안식일 날에 한쪽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는 일을 하기만 하면 고소하려고 지켜보는 인간들에게 던진 예수의 한 말씀이 있다. “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이 물음 앞에서 사자를 둘러 싼 하이에나들 같은 바리사이파 인간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스스로 표현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하면 악한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비겁한 침묵을 한국 땅에서 보고 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민들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그들의 계략과 상관없이 그 분은 그 분 자신의 길을 가셨다. 비록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눈치 보지 않고 끝까지 가셨다. 아무리 삶이 불우해진다 하더라도 나의 자유와 사명을 포기 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함부로 빼앗길 수 없다. 세상의 잣대가 나를 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재는 잣대이어야 한다는 것을 죽음으로 증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