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한테 물어보게나"
-김병용 소설 "개는 어떻게 웃는가" 읽고-
소시적 물님은 물으셨다.
“지금 무슨 책을 읽느냐”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세계 서설”을 읽고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말씀하시기를
“좋은 책 읽지 말아라”
예, !!!
도무지 스님의 공안 같은 말씀에 머뭇거릴 때면
이내 “이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 많다”
“좋은 책은 평생 읽어도 다 못 읽는다”
“정말로 좋은 책을 읽어라.”
정말로 좋은 책,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어도
좋은 음식을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셔서
음식만큼은 아무거나 잘 먹고 가리지 않는다.
흙에 떨어뜨린 것도 주워 먹고 아이가 뱉은 것도 잘 받아먹는다.
심지어 길가에 아무 풀이나 뜯어 먹고 솔잎은 껌대신 그만이다.
하지만 책에 대해선 이만 저만 고급이 아니다.
정말 좋은 책이 아니면 맘이 땡기지 않는다.
정말 좋은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웃을 수 밖에 없지만
술 못먹는 와인 감별사가 좋은 와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맛을 보면 대충 감이 온다.
그럼 김병용 소설집“개는 어떻게 웃는가”는 어떤가 ?
단 한가지만 빼고 이 소설은 정말 좋은 책이다.
아직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정말 좋은 책이냐고 반문할 이도 있겠지만
이건 막연한 질문, 막연한 질문에 대해선 막연한 대답이 최고다
가장 좋은 책만 읽는 내가 읽은 책이니 가장 좋은 책이란 말이다.
단 한가지 이 책에서 내가 꼽은 가장 좋은 책의 결격사유는
“개는 어떻게 웃는가?” 이 책표지의 개는 웃음이 없다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세상에 웃음 짓는 개의 이미지를 떠올려 웃어 보려고
이 책을 산 사람은 이내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닐 거다.
제목은 웃음 짓는 개를 떠올리는데 이 책표지의 개는 웃기는커녕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웃는 개를 잘 못 살려낸건 표지디자인어의 몫이지
작가의 책임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대게 그 책의 골갱이가 책표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면
웃는 개를 구현해보는 노력을 한층 더 기울였어야 하리라.
다만 이 책이 개 이야기도 아니고 별로 웃기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안 웃기는 개를 표지에 실은 디자인어의 심오한 뜻이 있었다면
그 탁견에 무릎을 칠 일이다.
사실 개는 웃는 개 웃는 것이 아닐 것이다.
“원장의 개”어쩜 이 짧은 소설이 추억 속에 가물거리는
멋진 내 과거의 군생활과 조직생활의 치부를 들춰내는 것 같아
영 씁쓸하기 짝이 없다.
세월이 가면 아무리 역겹고 넘부끄런 일이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법
아니 그렇게 인생을 미화시키려는 마음이 인간에게 내재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사람들의 거짓과 속임수를 용서할 맘이 아예 없다.
급기야 원장의 개”에서 바로 네가 그 개였다고 꾸짖는다.
마치 최고참 경철과 운규가 한참 개잡이 노릇을 하다가
개보다 못한 존재로 쓸쓸이 추락하듯이
아니, 넌 개보다 못한 존재라고 악다구를 퍼붓는다.
그 옛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히브리백성을 향하여
선지자 사무엘이 결국‘권력의 종’이 될 것이라며 통탄해마지 않았던 것처럼
“리바이어던” 인간이 만든 무지막지한 괴물 앞에 선 나약한 존재, 비겁한 존재가
바로 너라고 선언하는 작가의 외마디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기실 웃지 못할 쓰라린 군경험이 있지 않은가?
다행이 1중대 2소대에 4분대에 배치되었다.
내가 운이 좋지? 2소대라니 2소대 분위기가 자못 좋다고 해서
다른 동료의 불행을 등에 업고 참 째지는 기분이었다.
따불백 매고 내무반에 들어선 순간 고참들의 웃음소리가 진동했다.
역시 분위기가 좋다고 하더니,..
고참들의 물음이 쏟아진다. “기분이 어떠냐?”
내말이 “신선합니다.”
“야 이 자식아 여기 무슨 채소냐 생선이냐 !, 신선허게 ? ”
“군대는 역시 다르긴 다르구나”“말하는 꼬락서니가 꼬여있다.
시끌벅쩍하게 웃는 고참들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웃음 저편에서 내 동태를 훔쳐보는 안웃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보다.
내 관물함 앞에 자리를 정하고 허라는 대로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굵은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짝달만한 고참이 다가오더니
나한테 매섭게 인상쓰며 쌍욕을 해대지 않는가?
그에겐 낯모를 공포와 불안을 엿볼 수 있었다.
크나 작으나 우락부락하나 곱상하나 매 마찬가지,
오랫동안 공포에 질려 있거나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 사납게 변하나 보다
아님, 무서운 척 하는 게 고참의 특권이든지
성질이 급한 것인지 아니면 무척 화가 났던가, 짧은 말을 매섭게 툭 던졌다.
“야 이 c8넘아 여기가 니네집 안방이냐 쪼개게 ”
처음부터 약코를 죽일여고 했던 것인지 허스키하고 묵직한 욕설이 튕겨나왔다.
내 심장에 박히는 걸 보니 욕설도 꽤나 많이 해본 솜씨인게 분명하다.
나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대원들이 이 욕설의 파편에 처참하게 나자빠졌을까?
“쪼갠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웃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더러 웃지 말라고, 이건 또 무신 귀신 씬나락 까먹는 소리여?
“이 jot 같은 놈이” 속에서 번갯불이 쳤다.
찌끄만 사람이 마구 욕설로 중무장하고 공갈 치고 욕으로 뻥튀기를 해대니
속으로는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글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입술을 깨물어야 했던가?
쫄병에게 웃음조차 금기였던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못 볼 것을 많이 볼 것이니 웃지도 울지도 말라는 소리 같았다.
사람으로 살지 말고 짐승으로 살라는 뜻일게다.
웃지 못하고 울지 못하는 신세, 그건 사람이 아니다.
산시체요 기계의 낫도일 뿐.
나는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을 빼고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괴물 앞에 일체 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중대 헬로”
“중대 헬로”참 멋진 별명 같은디 내용인즉“바보팅이”라는 거다.
그러나 바보팅이 중대헬로가 나중에는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니
어느새‘깍두기 세쪽’에 돌아버린 쪽팔리는 이주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아이러니하게 무자비하게 욕하고 나를 두렵게한 그 찌끄만 고참이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 대신 맞아주고 나를 구해 줬으니
이 기막힌 인연을 무슨 말로 형언하겠는가 !
김병용 소설은 처절하게 나와 너의 문제에 대하여 집중한다.
그는 뒤틀린 인간 자아의 뇌관을 건들고,
이 뇌관이 터져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추락할 수 있는 존재가
네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착실하게 갈챠준다.
“ 이번 일로 원생놈들 뼈져리게 느낀게 있을거야,
지들이 강아지 한 마리만도 못한 신센줄 ”
게다가 “짐승아, 누구든 팔다리 하나쯤은 내 주고 산다”고
근원적인 연민을 토해내는 것처럼 이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끼리
상처를 싸매주고 사는 삶의 애환을 돌아보게 한다.
“ 개에게는 개의 삶이 있는 법인데, 사람에겐 사람의 삶이 있고..
그런 질서를 깨닫지 못한 나의 잘못이 결국 영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난 지금 영준이를 생각한다, 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볼 수 없는 영준이의 웃음을...
결국 난 영준이에게서 웃음을 빼앗고 말았다.”
수인이는 나의 칼퇴근을 기다린다.
이유인즉 나를 인형놀이의 적임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형놀이가 싫은데, 늙어서 인형놀이 하자니 영 불편하다
곰, 토끼, 사슴, 공룡, 생명 없는 인형을 생명체로 여기며
신나게 놀자고 덤비는 아이를 어찌할 수 없다
마지 못해, 볼멘 소리로, “ 난 하만데 넌 누구니?”하면
수인이는 난 큰귀토끼, 하며 말을 건넨다.
그러다가 얼른 도망갈 궁리를 하는데, 결국 난
수인에게서 웃음을 빼앗고 말았다.
작가는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웃음을 빼앗을 수 있음을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과도하면,
그것도 일종의 저주가 될 수 있음을 끝내 지적한다.
결국 허무를 안고 갈 홀로선 존재로서 길 없는 길
허무의 터널을 관통해야 하는 관계적 존재로서의 환영에 몸부림치면서
운명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인간 실존의 비애를 고발하고 있다.
또 하나 김병용의 소설의 언저리를 서성이면서 눈에 띤 것은
숨가쁘게 가장자리를 한땀 한땀 채워가는 언어의 솜씨다.
어쩜. 내가 잊어버리고 쑥스러워서 못쓰던 용어를
아주 고급스럽게 쓰고 있단 말인가?
껍질 속에 갇혀있던 거룩한 알맹이를 살짝 꺼내서
향내만 맡아 보라고 콧등에 내미는 악동처럼
야코, 낫도, 좁쌀영감, 씨알머리, 뺑뺑이, 갖은 사투리, 게다가 온갖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밀고 독자들을 약올린다.
근디 내가 쓰면 저속한데
왜 그가 쓰면 이렇게 구성지고 고급스러운거지?
끝으로 김병용 소설집 “개는 어떻게 웃는가?”
그 답을 조주의 공안에서 찾아본다.
“개는 어떻게 웃는가?”
“개한테 물어보게나”
09. 6.26일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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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스승님의 글에 칼만 댔습니다.
칼만 대고 약간 순서만 바꿔도 글이 훨씬 대중화 됩니다.
무수한 명언들을 떡져 놓으면 가치가 숨어 넘 아깝습니다.
잘라낸 것 끼리 또하나 올려 보겠습니다. (구인회 님의 직장 제자 이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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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흙에 떨어뜨린 것도 주워 먹고 아이가 뱉은 것도 잘 받아먹고
심지어 길가에 아무 풀이나 뜯어 먹어도
소시적 물님 말씀이
“좋은 책 읽지 말아라”
예, !!!
이내 “이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 많다”
“좋은 책은 평생 읽어도 다 못 읽는다”
“정말로 좋은 책을 읽어라.”
정말 좋은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웃을 수 밖에 없지만
맛을 보면 대충 감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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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김병용 소설집“개는 어떻게 웃는가”는 어떤가 ?
단 한가지만 빼고 이 소설은 정말 좋은 책이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책만 읽는 내가 읽은 책이니 가장 좋은 책이란 말이다.
단 한가지 결격사유는
이 책표지의 개는 웃음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암시를 위한
디자인너의 심오한 뜻이 있었다면
그 탁견에 무릎을 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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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 짧은 소설이 추억 속에 가물거리는
멋진 내 과거의 군생활과 조직생활의 치부를 들춰내는 것 같아
영 씁쓸하기 짝이 없다.
세월이 가면 아무리 역겹고 넘부끄런 일이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법
아니 그렇게 인생을 미화시키려는 마음이 인간에게 내재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사람들의 거짓과 속임수를 용서할 맘이 아예 없다.
급기야 원장의 개”에서 바로 네가 그 개였다고 꾸짖는다.
마치 최고참 경철과 운규가 한참 개잡이 노릇을 하다가
개보다 못한 존재로 쓸쓸이 추락하듯이
아니, 넌 개보다 못한 존재라고 악다구를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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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용 소설은 처절하게 나와 너의 문제에 대하여 집중한다.
그는 뒤틀린 인간 자아의 뇌관을 건들고,
이 뇌관이 터져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추락할 수 있는 존재가
네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착실하게 갈챠준다.
“ 이번 일로 원생놈들 뼈져리게 느낀게 있을거야,
지들이 강아지 한 마리만도 못한 신센줄 ”
“ 개에게는 개의 삶이 있는 법인데, 사람에겐 사람의 삶이 있고..
그런 질서를 깨닫지 못한 나의 잘못이 결국 영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난 지금 영준이를 생각한다, 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볼 수 없는 영준이의 웃음을...
결국 난 영준이에게서 웃음을 빼앗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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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이는 나의 칼퇴근을 기다린다.
이유인즉 나를 인형놀이의 적임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형놀이가 싫은데, 늙어서 인형놀이 하자니 영 불편하다
곰, 토끼, 사슴, 공룡, 생명 없는 인형을 생명체로 여기며
신나게 놀자고 덤비는 아이를 어찌할 수 없다
마지 못해, 볼멘 소리로, “ 난 하만데 넌 누구니?”하면
수인이는 난 큰귀토끼, 하며 말을 건넨다.
그러다가 얼른 도망갈 궁리를 하는데, 결국 난
수인에게서 웃음을 빼앗고 말았다.
작가는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웃음을 빼앗을 수 있음을
동시에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과도하면,
그것도 일종의 저주가 될 수 있음을 끝내 지적한다.
결국 허무를 안고 갈 홀로선 존재로서 길 없는 길
허무의 터널을 관통해야 하는 관계적 존재로서의 환영에 몸부림치면서
운명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인간 실존의 비애를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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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김병용의 소설의 언저리를 서성이면서 눈에 띤 것은
숨가쁘게 가장자리를 한땀 한땀 채워가는 언어의 솜씨다.
어쩜. 내가 잊어버리고 쑥스러워서 못쓰던 용어를
아주 고급스럽게 쓰고 있단 말인가?
껍질 속에 갇혀있던 거룩한 알맹이를 살짝 꺼내서
향내만 맡아 보라고 콧등에 내미는 악동처럼
야코, 낫도, 좁쌀영감, 씨알머리, 뺑뺑이, 갖은 사투리, 게다가 온갖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밀고 독자들을 약올린다.
근디 내가 쓰면 저속한데
왜 그가 쓰면 이렇게 구성지고 고급스러운거지?
끝으로 김병용 소설집 “개는 어떻게 웃는가?”
그 답을 조주의 공안에서 찾아본다.
“개는 어떻게 웃는가?”
“개한테 물어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