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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학목사가 전하는 4.19 혁명과 나

2013.04.24 12:25

물님 조회 수:14832

"미완의 혁명 4.19의 완성은 조국통일"
이해학 목사가 전하는 4.19혁명과 나
2013년 04월 19일 (금) 19:48:59 한별 기자ektlgofk@gmail.com

본지는 18일 오후3시 4.19혁명을 기억하며 서울시 수유동 4.19국립묘지를 방문한 이해학 목사를 만나 함께 묘지를 둘러봤다. 4.19를 직접 경험한 이 목사는 1년에 한 두 번씩은 꼭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있으며, 때로는 교인들과 함께 참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묘역을 둘러본 이 목사는 김주열 열사의 묘지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4.19혁명이 이해학 목사에게 어떤 의미인지, 4.19혁명의 정신은 무엇일지 들어보았다.

 

   
▲ 4.19국립묘지를 방문해 참배하는 이해학 목사. ⓒ에큐메니안

1. 이해학 목사님은 어떻게 4.19를 경험하게 되었나요?

전라북도 남원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광주공고 2학년 때 경향신문 배달을 하면서 체제에 대한 반 감정과 민주주의 의식이 발전을 했다. 당시는 3.15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고 자유당 정권의 탄압으로 신문사가 휴. 폐간을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4월 11일 마산에서 터진 3.15부정선거 규탄 데모 중 체류탄에 희생되어 경찰이 수장시킨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오르며 4.19혁명이 전국적으로 폭발되었다. 광주에서도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행진을 했는데 도청 앞에는 소방대가 물대포를 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근처에 있는 경찰서 쪽으로 방향을 바꿔 이동을 하기 시작해 한참을 가다보니 앞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 앞에는 경찰들이 공포탄을 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밀리면서 경찰들이 휘두르는 개머리판에 이마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지 8시간 후에 깨어나 보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마 뼈가 큰 골을 누르고 있어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반신불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깨어난 나를 대학생 누구와 같이 데모를 음모 하였느냐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형사의 온갖 질문과 폭압에 의해 견디지 못하고 병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게 되었다. 다행히 간호사들이 자취방에 와서 드레싱을 해주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2. 매년 4.19국립묘지를 찾고 특히 김주열 열사의 묘지 앞에서 한참을 앉아 계시곤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요?

주열이는 내가 중학교 때 살던 남원읍의 옆 동네인 금지라는 곳에서 살았다. 돈이 없어 진학하기 어려웠던 그는 마산에 있는 누나 집에 가서 마산상고를 다니던 시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같은 고향 출신이기도 한 주열이의 죽음은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주열이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 사실 그때 나도 죽은 목숨이었다. 주열이 묘 근처에 나도 있어야 하는데 살아있는 내 인생은 덤으로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덤으로 살려 준 목적은 죽은 사람에 대한 증언을 하고 역사의 정신과 부활을 완성하도록 하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주열이에게 올 때마다 반성을 많이 한다. 나의 역할을 많이 못했고 비겁했고 많이 망설였다는 자책감과 산 사람으로써 몫을 다 못하고 있다고 돌아본다. 그래서 여기에 오는 것은 내 인생의 바로메터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를 점검하는 명상의 터이기도 하다. 19일에는 사람이 많아서 생각할 겨를 없이 공식 참배객에 밀려가야 하기에 한가한 18일에 오곤 한다.

 

   
▲ 김주열 열사 묘지 앞에서 4.19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이해학 목사. ⓒ에큐메니안

3. 4.19 부상자 이면서도 정식 등록도 안하고 따로 찾아다니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4.19 이후 광주에서는 부상자동지회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동지회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여러 활동도 같이 했다. 그런데 부상자동지회회장이 정부가 만든 부정축제자 진상조사 기구에 심사위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를 데리고 가서 도청 앞 호텔방에 두고 회의장과 호텔방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호텔방으로 올 때마다 돈 다발을 가져와서 주고 갔다. 심사받는 사람들이 잘 봐달라며 몰래 돈을 계속 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4.19에 고환을 다쳐서 성불구 부상을 당한 이유로 부상자동지회회장이 된 사람인데 그 돈으로 밤에 여자들을 끼고 자고 돈을 흥청망청 사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의감이 충만한 젊은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라 얼마 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는데 4.19 부상자동지회가 지지행진을 하였다. 혁명을 팔아서 썩은 부스러기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이 너무 한스러워 그 뒤로 부상자동지회의 발길을 끊게 되었다. 이런 증언이 행여 4.19의 정신을 왜곡하는 자료가 될까보아 말을 못하였지만 이제는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4.19 혁명의 역사적인 사건을 부상자동지회회장 같은 사람이 망쳐놓고 있다는 울분에 침몰되었다. 또 4.19를 팔아서 개인의 이익과 부패사회를 조장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지금은 4.19정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 4.19를 상품화 하는 종교인 정치인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타락한 4.19 문화를 염려하게 된다. 나는 이곳에서 산 사람으로써 살아있는 증언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죄를 참회한다. 금년은 특별히 정전협정 60주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4. 4.19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19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정의사회구현을 추구하는 민주화도 있지만 평화통일이 중요한 것이다. 부정부패에 도전한 것은 절차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의를 통해서 민주질서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실제 참여했던 분들의 구호는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이었다. 민주주의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통일운동이다.

남쪽만 살고 북이 죽는 통일이 아니라 남과 북이 함께 사는 상생의 통일이어야 한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예멘은 이념이 다른 두 체제가 하나로 통일을 이루었다. 아직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최소한도 남북이 대결하며 쏟아 붇는 군사비를 줄여야 한다. 우리는 긴장을 극대화시킨 결과 미국의 신예무기 소비 국가만 되는 것이고 북은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로 맞서는 것이다. 극한대결 극한 긴장의 결과는 남북의 공멸의 길이요 상대적으로 일본 중국 미국은 무한 이익의 담보물을 얻은 것이다.

평화통일을 완성하는 것이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올해 정전협정 60년인데 지금쯤 온 교회들이 평화협정을 부르짖고 평화협정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오히려 종북좌파로 몰리는 이런 암울한 사회로 퇴보하고 있다. 교회가 부정선거에 관여하고 구조적인 조작을 통해서 부정선거를 감행하는 이런 세상이 아직도 반복되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자괴감에 빠져든다.

우리가 4.19를 경험했다는 것은 어떤 강한 권위주의적인 체제도 망할 수 있다. 국민을 위하지 않고 정의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망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이다. 아무리 독재 체제가 심화되고 철통같이 통제하고 감시하고 탄압을 해도 이 체제는 반드시 망하리라고 믿는 것은 4.19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면서 가졌던 자존감과 같을 것이다. 이 자존감으로 나중에 십자가를 지기까지 내적 힘을 갖는 것처럼 4.19가 역사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부활적 사건이라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정기가 폭발한 사건이다.

기독교는 4.19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하나님, 즉 우리사회 전체를 정의로운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회변화를 위해 조금 더 밀도 있게 일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혁명적 사건이었다. 단 미완의 사건이기에 완성시켜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고 그 완성은 통일이다. 그래서 통일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 4.19혁명을 기억하며 국립묘지를 찾은 대학생들. ⓒ에큐메니안

5. 4.19의 정신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 하셨는데, 교회가 이런 엄중한 남북관계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신앙인들의 시대를 바라보는 자세는 현실에 매몰되기 보다는 미래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질세계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새 하늘 새 땅 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생명을 지향한다. 생명은 나와 너 우리, 세계 모든 만물이다. 생명의 지향점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기에 공동체적인 틀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한 몸 이어야 한다. 전라도에 있건 서울에 있건 남쪽에 있건 북쪽에 있건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한 몸으로서 약한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고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무너진 민족의 성을 쌓아야 한다. 정의, 평화,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한다.

분단된 민족에서는 고난의 원죄인 조국의 운명의 굴레를 벗기 위해서 교회는 신뢰를 성을 쌓아야한다. 독일교회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서독교회는 나라는 갈라졌어도 교회는 하나라고 선언하고 동독교회 성직자들의 사례비를 감당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반정부 발언으로 구속이 되면 그들을 속전을 내고 구출해 내면서 성탄절에는 구속된 반체제 인사들을 숫자에 관계없이 석방하는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풍토를 만든 것이 교회의 힘이다. 그 결과 동서독 통일을 이루었다. 신뢰 프로세스는 대통령선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신뢰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에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교회가 알아야 한다.

권력에는 유착하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 개교회주의적 부흥과 성공신화는 예수 복음이 아니다. 기복신앙과 축복신앙은 예수께서 염려 한데로 금송아지 신앙과 바벨탑신앙에 빠져 가는 것이다. 바알의 회칠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염려하는 것은 교회가 권력의 시녀노릇을 한다는데 있다. 예언자적 통찰보다는 대세주의에 안주하며 결국 사회적 부패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천도교는 지금의 수운회관 건축비 모금을 하여 3.1운동비용을 부담하였다. 한국교회가 얼마  후에 관광지로 남을지도 모르는 교회건축에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저력을 한반도 분단극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맛 잃은 소금으로 길에 밟힐 뿐이다. 교회는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위해 한반도의 상황으로는 가장 가능한 중립국 논의를 확산해 볼만도 하다.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내서 이 시대정신인 남북의 평화를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면 정치인들은 교회와 등 돌리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으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제는 전쟁을 막기 위한 힘도 필요하고 방어도 해야겠지만 전쟁으로 갈 것인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에베소 2장에 예수님은 나누어서는 안 될 몸을 십자가에 달아 분단의 장벽위에 세워 원수된 것을 하나 되게 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평화의 주님이시다.  화해의 역할을 하는 기독교가 되어야지 분열을 조장하고 분열에 동참하는 기독교는 오는 세대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