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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자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사람

 

나치 시절에 혹독한 고통의 시절을 보낸 철학자 페터 부스트는 성서의 핵심을 디도서 3: 4절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실 때’ 라는 말씀에서 발견하고 임종 시 제자들에게 고별사로 주었다. 욕망의 지배를 받고 분노와 두려움에 근거한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적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있으니까 산다는 차원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바로 잡고 자신의 자유 의지와 선택권을 확실히 세우게 된다. 이것이 노예적 삶에서 자유를 찾아 가는 인간의 삶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는 신의 형상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에 맞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디도서는 이 자유인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세 단어로 요약한다. 그것은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신중함이란 ‘세상에 대하여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는다’ 는 뜻이다. 보통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환상이 없다’로 새긴다. 그러니까 신중함이란 실재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적 질서에 맞게 사는 것, 세상의 사물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환상과 몽유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죽도록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집의 평수를 늘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정이 파괴된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의롭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올바르게 사는 것, 곧 존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부당한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질서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의로운 이는 영혼의 내적 질서와 일치하여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본질을 따르지 않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자기를 공격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은 남을 공격하고 고통을 주게 된다. 인류가 빠진 함정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이 불의 하다는 것은 자기를 공격하고 고통 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불의(adikia)라는 것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의로운 사람은 타인을 의롭게 대한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올바르게 대한다.


경건이란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경건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나의 미래를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책임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올바른 경건은 파멸의 소용돌이에서 나를 구원한다. 또한 경건은 ‘모든 사물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 보시듯 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환상이 빚어낸 것이 아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남들의 평판과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똑바로 바로 보아야 나도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대상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볼 수 있는 눈이 멀어 있다. 만약 상대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지혜를 얻은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경건의 자리에 들어 선 사람일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는 나답게 보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보아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그대임에서 온전히 빠져나와 그 분의 그분임으로 녹아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무엇을 나로 아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의 나됨을 회복하는 것이 경건이다. 그 때 내 에고의 눈이 멀고 신성의 눈이 뜨게 된다.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영원한 희망을 갖게 된다. 영원의 시각에서 나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희망 속에서 사는 사람만이 올바르게 살 수 있다. 절망한 자들이 어찌 올바르게 삶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희망은 ‘행복한(makarios)'이라는 단어와 결합되어 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나와 이 세상의 궁극적 완성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행복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이 희망만이 세상에 지독하게 집착하지 않게 하고 쓸데없는 분노와 욕망에 따라 살지 않게 한다. 이 때 인간은 무질서와 혼돈에서 자유로워진다.


지구에서의 삶은 영원히 거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늘 백성으로서 정화시켜 새롭고 자유하게 하시는 그 분의 뜻을 깨닫고 삶의 순간들을 선행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표현하는 길이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존재에 가장 올바르게 부합된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깨닫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은혜 안에서 찾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은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한 태도이다. 이 태도를 갖게 될 때 내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내는 어리석은 삶의 방식을 청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