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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 자아? 아니 정신.-

 

(46×287)

 

인문과학대학 철학과 3년 9001951학번 이규진

 

 

 

19××년 ×월 ×일

내 생활의 주기적-발작적-리듬이라 할 수 있는 상사병의 대상으로 창일 씨가 자리했다. 왜냐 라고 하면 침묵과 눈빛으로 답할 수밖에 없고, 이번 기분은 일종의, 아니 전면적인 모멸감이라 부르고 싶다. 당분간 나는 그만을 위해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세수하고, 옷을 입으며 잠을 잘 것이니까.

 

19××년 ×월 ×일

보잘 것 없는 당구장 카운터 아가씨인 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창일 씨에게, 나는 자격지심과 지레 환상이 깨질 것을 두려워함, 또 그 앞에서 로봇처럼 굳는 나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의 복합적 이유로

“싫어요.”

라고 힘들여 말했다. 사실 그가 그런 제안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당구 80실력의 창일 씨가 처음에 자기 반 학생을 찾아 한  당구장에 들어와, 그만 당구에 재미를 붙인 지 한 시간 쯤 되었을 때, 멀쩡한 한 학생과 모자란 한 학생-언어장애와, 좌 반신의 부분 마비로 걸음걸이가 이상함.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창일 씨가 말리다가, 모자란 학생이 자신을 무시한 데 분개해서 모자란 학생과 치고 패고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었다. 그 때 창일 씨가 더듬더듬 흥분하여 내뱉은 몇 마디를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야 이 개 새꺄…, 네가…, 네가 그렇다고 나한테 대들어?”

이런 대도시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우스울 만큼 기분대로 하고 바보가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화를 내다니! 대단히 단순하거나 뛰어난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닐까! 그만 나는 김 창일 선생님에게 반해버려서 싸움이 일단락됐을 때, 가벼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급조치와 커피를 대접하고, 그 순수함에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식사가 싫으면 아가씨가 좋은 걸 말해 봐요.”

“…….”

“요 아래 카페에 있을 테니 끝나고 내려와요.”

“그럼 카카오를 마시겠어요.”

나는 이렇게 드디어 창일 씨와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친해지는 데에는, 그리고 길들여져서 없이 못살게 되는 데에는-적어도 나는 - , 별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 없었다.

 

19××년 ×월 ×일

창일 씨를 알아갈수록 나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그것은 환희와 아픔이 함께 하는 늪이다. 창일 씨가 요즘 권하고 사주는 책들은 내게 ‘이거구나!’하는 속 시원함을 주기도 하지만, 독서량과 창일 씨와의 대화 량이 많아질수록 천성이 권태롭고, 항상 나른하고 공허한 분위기의 내 생리와 체질에는 납득하기 힘겨운 요소가 너무도 많이 있다. 창일 씨는 일단 알아야 할 뿐인 것이라고 얘기한다. 내가 완전히 무지한 이 쪽 저 쪽을 우선 알아야 바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지식일 뿐이지, 자기가 나를 의식화하려거나 그 부분에 자신이 뜻을 둔 것도 더더욱 아니라고 한다, 더욱 헷갈리게 스리. 변증법, 한국 현대사에 관하여, 또 마르크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북한에도 그저 체제가 다를 뿐인 똑같은 사회가 있다는 것, 또 매일 신문 보기 등등의 창일 씨가 내주는 숙제. 그리고 내가 눈 떠가기 시작한 것들 때문에 차츰 나는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당구장 주인이며 이 건물의 주인인 내 외삼촌부터. 창일 씨가 학교에서 주로 하는 일은 학생과의 상담이란다. 문득 가끔씩 창일 씨 앞에서 나의 고교 중퇴라는 명예롭지 못한 학력이 슬퍼진다. 생전 처음으로 그 일에 후회를 느낀다. 창일 씨는 그 부분에 관해서 무척 나를 칭찬하는데, 이를테면 천재성의 발로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였다고 이야기 한다. 자신은 똑같은 부분에 공감했지만 생각에 그치고 말았었고, 그것은 주위의 시선과 기득권을 본능적으로 수호한 것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지금 이 순간에 한해서 만일 나의 간이 창일 씨의 눈에 좋다면 기꺼이 바치고 싶을 정도로 창일 씨를 사랑한다, 미칠 것 같은 열정으로.(창일 씨는 눈이 굉장히 나쁨.)

 

19××년 ×월 ×일

“가영아! 있지, 오늘은 특히 우울해. 너라면 우울한 시대에 살기 때문이라고 그저 치부하지는 않겠지?”

“또 그 지병 이야기 인가요?”

“올해 오월은 참 춥다. 해가 갈수록 추워.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얼어 죽을 것 같아……. 가영아 있지, 칸트는 독신인데 왜 성병으로 죽었을까?”

창일 씨가 자기 반 어느 학생을 반 죽도록 패고 싶었지만, 따귀 두 대로 타협한 토요일 오후 종일 참 말이 많다, 그답게. 유쾌하지 않다. 더욱 애처로운 생각과 그 앞에선 항상 그렇듯 감정의 홍수로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헤어져 집에 가면 눈물이 흐를 것 같다. 나는 창일 씨 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새삼스럽지만 처음 했다.

“가영아 세상에 사랑이 있을까…? 단지 그 순간의 착각이 있을 뿐이지, 그것도 잠시. 연민 정도 가 그 중 비교적 가장 큰 사랑일거라고 생각해.”

사람은 구조적으로 자기 이외의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창일 씨는 말한다. 그리고

“너를 사랑할 작정이 아니었는데…….”

라는 모호한 말로 끝을 흐렸다. 그가 나를 그리워하는 시간과 내가 그를 발작적으로 보고 싶어하는 시간 사이엔 항상 우주적인 시차가 있나보다. 그래 큐피드 화살은 한 번에 한 방향일 수밖에 없고 나의 모든 비극도 거기 기인하는 것이다.

 

19××년 ×월 ×일

태백산맥을 읽히고 창일 씨가 소감을 묻기에, 김 범우는 싱클레어, 염 상진은 데미안, 소화는 춘희의 마르그리뜨 같다고 얘기해줬다. 그리고 심재모와 염상구가 가장 매력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심 재모는 그렇다 치고 염 상구는 왜냐고 묻기에 자기편에 확실히 의리 있고, 연민을 강하게 자극하는 무엇이 있다고 말한 뒤, 길게 얘기 할 것 같아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고 선수 쳐서 선언했다. 헤어질 쯤 소공자의 책 두 권과 마하 무드 라의 노래를 선물 받고 나는 독후감을 약속했다.

 

19××년 ×월 ×일

창일 씨의 엄마는 어떤 여자였을까? 어린 아들과 술주정뱅이 남편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택한 과감한 인텔리 여성……. 창일 씨는 아버지가 술꾼에 위대한 철학자요 도인이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자주 맞기도 했지만 자신처럼 완전한 아버지의 이해와 사랑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아무 욕심도 없고 너무나 착하고 어질어서 세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는데 대학 3학년 때 교통사고로 그만 돌아가셨다고 했다. 따라 죽으려 할 만큼 창일 씨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복수 때문에 죽기를 보류하다가 그 작 저작 아직까지 살게 됐다고 했다. 내 가슴은 미어지고 오늘 창일 씨의 표정은 그대로 내 가슴에 예리한 날이 되어 아로새겨졌다. 헌데 그런 말 하는 창일 씨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슬픈 건 또 왤까? 요즘 창일 씨는 이상할 만큼 가라앉고 분노의 습관도 잃어버려 간다. 말 수를 잃고 무엇에 쫓기듯 조급한 몸짓, 그리고 당구장 일을 그만두라고 성화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외삼촌댁에 놀러 와서 도와주고 있을 뿐인 것을 그가 이미 알고, 내가 고등학교 자퇴 후 몇 년을 쭉 집에서 놀고먹었을 뿐인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새삼스러운 이런 식의 요구는 역시 남성은-창일 씨가 아니라 남성이, 허나 창일 씨를 포함한.-‘치졸하구나!’라는 생각을 굳게 한다. 허나 약간의 쾌감, 적어도 그의 여자가 되어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에게 내가 말이다. 헤어지며 창일 씨가 얘기하기를 실직했다고 했다. 무능한 어용교사 쫓아내자고 데모하기에 미리 겁먹고 사표 냈다고, 피식 웃는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주절주절 얘기하며 다음 날 술을 먹자고 했다.

“오늘 창일 씨는 겁쟁이 같고 무척 초라해 보여요.”

라고 그에게 작별 키스를 해주며 나는 얘기했다. 그러나 오늘 창일 씨가 함께 죽자고 하면 기꺼이 따라 죽어 주리라, 여전히 나는 그를 위해 숨쉬고 있지 않은가!

 

19××년 ×월 ×일

우리는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해가고 나는 무언가 절망스럽고 나는 왠지 그가 참을 수 없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종의 재앙이다. 이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아픈 쾌락은 괴로움으로 화하여 간다. 창일 씨가 실직한 뒤 부쩍 ‘죽음’이 우리의 화제로 떠오르곤 한다. 창일 씨는 점점 더 횡설수설하는 버릇이 심해지고 더더욱 무언가 조급해져 가는 것 같다.

“죽음이 삶의 가장 치열한 방식이라고요 ?”

“삶을 두려워해서 포기하는 죽음과 종이 한 장의 차이지만, 이를테면 결과가 그렇다는 거야.”

또 말하기를,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에 상관없이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든 신의 힘이든 무의식의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 사는 거라고 한다. 우리가 꽃이나 풀을 기를 때 싹이 노랗고 시든 것을 여지없이 뽑아내버리듯 무의식이 삶을 포기한 인간이 그렇게 지구에서 뽑혀지는 것이어서, 그 형태가 암 따위의 병이든 교통사고든 자살이든 관계없이 그렇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죽음이 소멸 아닌 이동이라 생각하는데…, 그래서 죽음도 끝이 아니라 생 각하면 가끔은 답답해지는데…….”

“그건 죽어봐야 해결되는 문제겠지 뭐.”

그리고 우리는 별 말 없이 술을 마셨고, 그날 창일 씨는 너무 취해서 나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쨌든 그리하여 같이 밤을 보내게 되었다.

 

19××년 ×월 ×일

나는 서서히 때때로 내게 무심해 보이는 그가 용납할 수 없어지고, 어떤 피해의식으로 객관과 중심을 잃어 버려간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친 것이다. 머리와 가슴의 불일치. 나는 그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 안의 ‘여성’임을 감지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나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분명히 ‘나’인 것을 어쩔 수 없다. 추하고 삼류다. 싫다. 그리고 아프다. 이렇게 초라해진 내가 비참하고 싫다. 내게 여자만 남아버린 가슴의 통증이 저주스럽다. 내 안에는 마치 두 종류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내 자신이 싫어서 견딜 수 없다. 이런 상태로 내가 어찌 그를 사랑할 수 있으리! 그는 내게 재앙을 제공한 미운 사람이며, 나는 그가 미워지는 밤이면 베갯잇이 젖을 때까지 울곤 한다.

 

19××년 ×월 ×일

그는 악마다. 천사다. 악마다. 천사다. 악마다. 천사다. 악마다. 다시 한번 집 앞 가로수 가지를 끊어 한개씩 떼어내 보아도 역시… 그는 악마다, 잔인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나는 그 악마를 사랑하는 가여운 천사? 우습지도 않다. 그가 악마면 나도 악마다. 어제 ‘종묘’에 놀러 가서 있었던 일을 곰곰 생각해 본다. 그가 잎이 많은 가지를 꺽어 하나씩 떼어내며 짐짓 심각하게 말했던 얘기가 왠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살아오는 동안 이런 놀이에서 한번도 ‘악마’가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고….

“다시 한 번 해 봐, 창일씨! 그런게 어디 있어?” 세번, 네번… 일곱번을 했는데 악마가 나왔다. 내 표정이 창백하고 굳어졌는지 창일씨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필시 장난을 친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지, 뭐.”

그러자고 순순히 말하는 그가 나는 얼척없고, 나쁘고, 무정하게 느껴져서 왜 달래거나 해명해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라기 보다는 따졌다. 갑자기 그의 얼굴엔 피곤하고 귀챦은 기색이 역력하고 더욱 무정하게 가봐야 할 데가 있다며 혼자서 집에 가란다.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쳐서 얼른 뛰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혹 그가 잡으로 오거나 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지만 그것이 가슴 아픈 것을 전혀 덜어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이런 괴로운 게임은 정말이지 끝내자고 다짐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러나 나는 그와 헤어지고 말 것이다. 왠지 서러운 생각에 나는 불과 얼마 전, 처음 우리가 주고 받은 편지를 꺼내 보았다. 나는 내가 보내는 편지를 복사해서 같이 묶어 놓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창일씨에게 받은 편지 중 일부이다.

『우리가 순간 순간 혼연을 다해 호흡하는 모든 것은 모두가 한 때이다, 동시에. 한 때의 극도의 절망, 한 때의 기쁨, 한 때의……. 젊음으로 기인하는 치열함과 고통이 있다면 반드시 그 상대 적인 것의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연륜이라는 단어 속에 각각의 차등을 인정 받지 못한 채, 녹아서 그 중 하나가 되고마는 이치. 지나온 자신을 무시한 채 두드러진 하나에 시야가 가려지고 말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편견의 벽을 수 천 수 만 가지의 종으로 두르고, 각각 통용되지 않는 언어로 두들겨 때려 맞추며 우습게 사는 것이다. 아주 조금 공통된 것으로 단정짓고 좋아하며 사실은 더욱 더 우스운 말도 안되는 단어들의 나열만 계속될 뿐인 것이다. 입을 다물자. 입을 다물고, 혀를 물고, 피를 흘리자. 중략.』

그리고 내가 쓴 답장.

『최고의 시간을 최고의 파트너에게 바칩니다. 누구나 가슴의 불랙홀을 가지고 있고, 그 구멍은 때때로 세상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처럼 치명적이고 완만하며 영구적일 것같은 통증으 로 우리를 괴롭혀 우리는 너무 거창하게 포기하고 슬퍼하며 단지 통증의 감소를 위한 진통제 격의 제스쳐를 나름대로 습득해가며 보이지 않게 방패를 겹겹 치며, 때때로 술을 빌어 미친 척 세상이 어떠니 인생이 어떠니……, 실은 한 걸음도 자신 외의 사람에게 다가서지 않으면서. 그 런데 정작 그 구멍의 실체는 아구 맞는 한 사람이면 꽉 차는 것인데…. 자신의 체험 없인 결코 깨닫지 못하는, 타인의 말과 상징 체계의 어떤 것으로도 알려줄 수 없는, 겪어보면 너무나 간단 한 이치의 해답. 이것을 알게 해준 창일씨에게 23세 처녀.』

 

19××년 ×월 ×일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기록을 해야한다.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커피숖에서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로 나를 후려쳤다. 그의 눈은 이성을 잃었고 그런 그를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울음이 범벅되어 잘 나오지 않는 소리로 꺽꺽대며 저주를 퍼부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어쩌면 그가 사과하고 사정하면 모든걸 다시 시작해보려는 의도였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정말로 이런 구질구질한 감정의 굴레와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러고 말 것이다. 그러고 한참을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한 달 쯤 되어서 나는 엽서를 한 통 받았을 뿐이다.

『가영이!

감당할 길 없는 허무의 느낌의 습격을 받을 때 나는 죽고싶을 만큼 살아 숨쉬는 게 무섭고, 싫 고, 힘들고, 무언가 억울하다. 그건 비관이다, 허무 아닌. 허무와 인식 수준에 있어 통할 뿐 어 쩌면 구질구질한 생에의 집착, 욕심에 다름 아니다.』

내가 대체 바라고, 기다리고, 혹 기대했던 내용은 무엇이었나? 나는 엽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나쁜 자식! 잘 살아봐라. 거기엔 어떤 그리움도, 미안함도, 사랑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래, 나만 이렇게 괴롭고 억울한 미련이 남은건가? 나는 외삼촌에게 더이상 당구장 일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하고 그길로 짐을 챙겨서 고향 가는 밤차를 탔다.

 

19××년 ×월 ×일

이제는 고향이 정겹다. 무료하게 느껴졌던 그 작고 깨끗하고 적막한 소도시가 아픔을 치유하러 귀향한 나를 반가이 맞아 준 것이다. 나는 그리고는 정말 죽을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필시 일없이 무료하며 괴로울 시간에 차라리 앓으며 병마와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있어 다행스럽단 생각이 들어서, 가급적 오래 아프기 위해 엄마를 속이며 일체 약을 먹지 않았다.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창일씨는 내 죽음을 슬퍼해 줄 것인가?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는 가끔 너무나 창일씨가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을 것 같으면 그를 꼭 한번만 만나보고 죽으리라….

 

19××년 ×월 ×일

사실 그에 대한 미움과 집착은 내 자신에 대한 오기와, 억울함,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내 지나친 사랑에 대한 환상과 어리석은 기대가 막상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와 깨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달아나고 만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고서부터 집에선 선을 보라고 성화다. 이제 서울에 갈 생각말고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고. 어렵게 승낙을 받았던 상경이어서 내가 이런 몸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어쩌면 완고한 아버지에게 다시는 대항할 수 없게 된 걸 의미하기도 했다. 기분전환이 될지도 모르고, 또 모든것을 포기하고픈 자학적인 기분으로 나는 그러마고 했다. 아아! 그것이 후에 몰고올 무서운 후회의 씨앗이 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선을 보던 날 나는 너무나 뜻밖에 창일씨와 만나게 되었다. 선을 본 남자는 저녁식사 후 집근처까지 나를 바래다 주었고, 우리는 가벼운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그리고 들어가다 나는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서 있는 창일씨를 본 것이다. 아! 무엇보다 그리움과 기쁨이 앞섰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우는게 당연해… 이렇게 기쁜데….”

그러다가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괴롭고 가슴이 아팠는 지.

“창일씨! 오래 기다린거야? 어디가서 우리 얘기 좀 해요.”

나는 눈물을 닦으며 얘기했다.

“그러지, 뭐….”

나는 찻집으로 향하며 다시금 시작될 우리의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걸 느꼈다.

“나 오늘 선 봤어요.”

“…….”

“정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얼마나 아팠는데… 아파서 죽을 뻔 했다니까….”

“…….”

좀 이상했다. 그가 단지 삐졌거나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는걸 알았어야 했다. 창일씨는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동안을 나 혼자 얘기하고 침묵이 있고 그러다가는 창일씨가 일어서자고 했다. 그리고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가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는 정말 미인이었대. 너… 조금 우리 엄마 닮았다…….”

그렇게 말하는 창일씨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상한 웃음이었다. 너무나 절망적이며, 감정을 아예 잃어버린 것 같은 웃음. 악의없는 웃음. 맥빠지고 기운없는 웃음. 너무나 아플것 같은 웃음. 너무나 아프게 하는 웃음.

“내일 전화해요, 오늘 여관에서 자고. 오늘 밤에 어디 가버리면 안돼요.”

그 뒷모습에 대고 내가 소리친 말이었다. 물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창일씨는 연락하지 않았다.

 

19××년 ×월 ×일

곧 나는 다시 창일씨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비장한 각오와, 내 생에 중요한 결단을 할 때 항상 느끼는 완전한 집중과 무모하리만치 용감해지는 내 안의 어떤 맹목적이고 뜨거운 기운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며, 내가 제정신이라면 결코 하지 못할 일을 단행했다.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서울행 기차를 타고 만 것이다. 서울은 그대로이며 무엇을 하다 왔느냔 말 한마디 없이 단지 길이 빡빡하고 여전히 교통체증이 있을 뿐이었고 외삼촌은 반가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 내 앞으로 온 몇 통의 편지를 보게 되었다.

『사람의 감정처럼 더럽고 구차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대도 가까운 이를 상쳐입혔다. 상처받 은 자는 금방 본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히지 않는다면 단지 그 이유는‘안일’과 ‘나태’ 그리고 ‘용기없음’일 뿐이리……. 없다, 무엇도, 결국 존재할 수도, 그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 그것이 상처받은 인간의 본성이다. 나의 눈매는 늘 따스하고, 혀는 간사하며, 팔은 그대의 등허리를 감싸고 있다.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었으며, 때때로 스스로도 착각하리만큼 그대를 아낀다고 말하리라. 들리는가? 추잡한 온갖 잡다한 감정의 밀고 당기는 직직하는 소리가.』

『가영이!

너와 한 집에서 요리를 하며, 세끼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고 밤참을 먹으며 눈이 감길때 까지 너의 수다를 듣다가 아침엔 잠깐 같이 연속극과 뉴스를 보기도 하며, 낮에는 청소하고 책을 보 다가 음악을 듣다가 잠깐 졸리면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산보도 하고 새벽까지 무료하게 잠이 안오면 간단한 안주에 술을 마셔 취하기도 하고, 해장국도 끓여 먹으며 일주일만 함께 지냈으 면 좋겠구나.』

『절망의 계절. 산천은 그대로이나, 인간은 수시로 변하고, 내 마음 둘 곳 어디에도 없네. 아직도 젊어서인가? 피가 너무 뜨거워서? 처음부터 실은 나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단 지 피끓는 청춘이 어차피 몇 번은 겪어야 했을 질곡을 지나온 것 뿐이리라. 우선은 네게서 달 아나고 보자. 그 지긋지긋한 유사진실에서 일단은 달아나고 보자고….

환상의 섬. 진짜 끝. 끝을 향해 세상이 기준하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간일까…,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일 수 있을까…, 내가 네게 바라는 게 정말 무얼까……. 이유를 잘 모르겠다. 네게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다는 게 이해할 수 없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삶의 무 게가 점점 나를 억누르고 머지않아 형체도 없이 사그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너와 나의 삶의 방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우리들 가슴 어느 구석엔 가 우리 둘이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19××년 ×월 ×일

내가 그런 사연들을 받은 얼마 후 창일씨는 정말로 아무일 없던 것처럼 한 당구장에 나타났다. 편지를 읽고 이미 내 평생 그를 볼 수 없을거란 절망으로 모든 삶의 기대도, 의욕도, 슬픔마저도 증발해 버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내 육신이 겨우 숨 쉬고 살아가도 있는 내게 거짓말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창일씨는 나타나 큐대를 잡는다. 그 즈음에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되어 오던 외삼촌의 이민 절차가 거의 마무리 돼가고 있었다. 당구장일은 생계라기 보다는 취미처럼 하고 있었다. 내마음대로 문을 열고 문을 닫는 건 물론이고, 외삼촌은 처분권도 내게 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신듯 했다. 외숙모와 외사촌들은 이미 호주에 자리잡은 지 몇 년이 지났고 이번에 외삼촌은 아예 여기를 정리하고 가실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며칠 후 외숙모가 서울에 오시기로 돼있었다. 창일씨와의 해후가 빚은 잠시의 흥분이 지나고는 우리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전처럼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창일씨! 당구장 내 소유되면 우리 둘이 거기서 같이 살까?”

잠시 창일씨는 놀라는 듯 했다. 곧 나는 그런저런 상황들을 모두 얘기했다.

“외숙모가 이 주에 온다고?”

“응. 그리고 이 달 안에 모두 호주로 가시게 될거예요.”

“정확히 언제 오시니?”

“어머, 왜 그렇게 관심있어요? 오랜만에 보네, 이런 모습.”

나는 애써 비행기 도착 시간까지 기억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쭈욱 며칠은 정말 오랜만에 우리는 행복하고 다정하고 열심히 사랑했다. 창일씨는 내가 눈뜬지 얼마 안돼서 나를 찾아오고, 내가 잠들 시간에야 집에 갔다.

 

19××년 ×월 ×일

기다리던 창일씨는 오지 않았고 대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공항에 가던 외삼촌 차가 어느 멍청한 남자의 차와 충돌했는데 그 멍청한 남자는 죽었단다. 그 멍청한 남자의 이름을 듣고 나와 함께 간 외숙모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그 날 오후 창일씨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쓴 날짜가 꽤 된 걸 보면 이 멍청한 악마는 이 일을 이미 오래 전 계획한 것임을 알게 한다. 목격자의 말이, 신호를 위반하며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정작 부딪히는 순간에는 외삼촌 차를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무리를 하여 핸들을 꺽어 희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아마 살아날 것을 절망하며,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는 가영이! 내 어머니 두번 째 남편의, 즉 아버지를 치어 죽인 과실치사범(?)의 외조카에게. 스물 여덟! 죽기 아까운 나이-인지 아닌 지 분명치 않으나, 대개 일컬어 그렇다고들 할 거니까.-. 일단은 그렇게 둘러대기로 하자. 해서 다 시 전장으로 뛰어드는 훌륭한 군인의 칼과 총을 메고, 최대한 어기적거리지 않는 걸음으로 출 근을 하고, 세수를 하고, 어울려 점심도 먹으며, 비교적 잘 갈아진 내 무기를 힘겹지만 몸의 일 부인 척 오해하게끔, 자연스럽게 적시에 사용하며 버티어 보는 것이다. 운좋게 사고사라도 하는 날이 오거나, 또 한 번 죽기를-그 때엔 진짜로-실행하는 날이 오거나, 혹은 호호 백발이 되어서 자연사 하는 그 날까지……. 가당치 않은 헛소리, 죽기 싫어서……?』